‘비동시성의 동시성’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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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3-10-21 12:38본문
예전에도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요즘 우리사회는 ‘비동시성의 동시성’(比同時性 同時性)의 사회다.
이 말은 1930년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당시 독일 사회를 규정하면서 사용한 말이다. 그는 이 말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늘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외형적으로만 동일한 현재에 존재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어쨌든 독일의 사정은 그렇다고 치고 요즘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어느 전문가는 “해석에 차이는 있지만 많은 학자들이 한국 사회의 특징을 비동시성의 동시성으로 설명한다.
전근대, 근대, 탈근대의 특징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과학적 합리성과 경제적 효율성을 자랑하는 삼성전자가 전근대적인 세습을 통해 경영권을 유지하는 현상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담긴 진정한 뜻은 우리사회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것이 현재와 함께 공존하고 있는듯 하지만 아직도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제도와 관행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특정 세력에 의해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사회는 아직도 유교적 사고와 산업화 시대 규범, 세계화와 디지털사회 같은 여러 세대가 혼재해 있어 단점과 장점이 어우러져 있다는 것이다.
문학 평론가 도정일 교수는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인은 의식과 태도가 쪼개져있다며 그걸 ‘두 개의 다른 시간대를 가리키는 시계’로 비유했다.
“한국인은 두 개의 시계를 차고 있습니다. 하나는 전근대의 시간에 멈추어선 왕조의 시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섭게 내달리는 현대의 시계입니다, 어떤 때는 왕조의 시계에 맞춰 행동하고 어떤 때는 현대의 시계에 맞춰 행동합니다, 그런데 그 두 시계 어느 쪽도 합리적인 것이 아니죠. 지금 우리 사회는 고도의 경쟁주의 사회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파벌, 학벌, 연줄, 서열, 신분 같은 전근대적 비효율의 요인들이 선의의 사회적 경쟁력을 다 갉아먹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이처럼 ‘비동시성의 동시성’(比同時性 同時性)의 사회, 즉 계층, 이념, 세대, 지역, 문화 등의 균열 지점에서 갈등이 분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공존의 가치를 인정하고 지향해야 한다고 여러 전문가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스웨덴의 관습법인 얀테(Jantelangen)의 법칙에 다음과 같은 삶의 원칙이 있다.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모든 것에 능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남들을 비웃지 마라, 아무도 당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하지 마라”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위기’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는데 새것은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이 말은 ‘옛 것을 알면서 새 것도 안다’는 뜻의 ‘온고지신’(溫故知新)과 어쩌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잘 보듬고 어우러지면서 잘 공존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 문화의 고도성장을 이룬 나라다. 정치만 빼고, 아무튼 앞부분에서도 언급했듯이 전근대ㆍ근대ㆍ탈근대적 요소가 동시에 공존하는 나라다.
이런 현상은 어느 나라에서건 이런 현상은 일어나지만, 우리나라는 이런 현상이 더더욱 심하다. 한 예를 들자면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사람이 웰빙을 생각하는 것처럼 이른바 ‘쏠림현상’이 매우 심하다는 의미다.
독일의 어느 학자는 “특정한 사회의 발전이란 도리어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란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게 마련이다”며, 결국 모든 사회집단은 자신의 고유한 역사와 경험을 공유하면서 발달한다고 했다.
이제 우리사회도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란 원칙에 동의하면서 서로 인정하고 함께 해야 할 것이다. 이관일(시인, 대중문화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