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그 영원한 추억의 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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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3-07-08 16:13본문
“명동은 바로 추억의 사진, 추억의 공원, 그 흔적과 자국들은 바로 기억이고 제 자신입니다. 내 젊은 날 옛 연인이나 오래도록 소식이 끊긴 친구와 거닐었던 명동의 무심한 찻집과 가로수들의 기억에는 내 추억의 지문을 지니고 있습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명동은 이 땅의 예술인들을 위한 하나의 해방구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의 면적은 0.99㎢이며, 인구는 약 3만 여 명이다. 조선 초기에는 한성부 남부 명례방· 훈도방 지역에 속했고, 일제강점기에 명치정1정목, 2정목정회가 설치되었다. 1946년 명동1·2가동으로 바뀌어 명동1·2가와 충무로1·2가 일부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명동은 서울특별시를 상징하는 번화가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지금의 충무로인 본정(本町)보다 낙후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주택가였으나 일제강점기 충무로가 상업지역으로 발전하면서 인접지역인 이곳도 그 영향을 받아 상가로 변하게 되었다.
특히 이곳에 위치한 한국 가톨릭의 총본산인 명동성당은, 유신독재 등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인사들의 각종 집회와 농성, 피신 및 단식 장소로 국내외에 알려져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들어 시위가 잦아 낭만적인 모습을 잃었으나 해마다 명동축제를 개최하는 등 1990년대 후반 들어 옛 모습 되찾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은 소위 한류라는 대한민국의 전 세계적 트렌드로 외국인이 더 많은 거리로 변했다.
이런 배경을 가진 명동은 한때 이 땅의 예술인들을 위한 하나의 해방구였으며, 그들만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일제의 억압사슬에서 벗어난 해방, 그리고 해방 직후의 좌우 대립, 민족상잔의 6·25전쟁과 분단 등 엄청난 시련을 겪은 수많은 문인과 화가들은(물론 일반인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곳에서 그들의 예술혼을 불태웠었다.
명동백작이란 별명을 가진 시인 이봉구(1916~1983)는 화가 박서보 , 시인 김수영, 박인환, 화가 이중섭 등은 전쟁으로 인한 상실감을 인내하면서 명동에 모여 예술을 논하고 인생을 노래했다고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특히 시인 김수영은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아내를 잃으면서 전쟁에 대한 환멸, 그리고 화가 이중섭은 빚더미에 앉아 일본에 있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캔버스에 편지에 담배껍질에 그림을 그렸다.
시인 박인환은 멋지게 차려입고 찻집에 나가 사람들 앞에 노래를 불렀고, 명함에 ‘대한민국 김관식’이라고 당당하게 써 붙이고 다녔던 시인 김관식은 술에 취하면 서정주, 김동인과 같은 거장들을 서군, 김군하고 부르면서 비틀거리며 거리를 활보하고 기행을 일삼으면서 그 시절 예술인들은 전쟁의 황폐함 속에서도 낭만을 찾았다고 전했다.
70년대에 들어와서는 또 다른 명동파들이 생겨
시인 강민(1933~ )은 명동을 이렇게 추억하고 있다.
당시 빈대떡집으로 유명한 ‘송림’, ‘송도’에는 아나운서 유창경, 소설가 정인영 등이 출입했고,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했던 목로 ‘은성’에는 이봉구, 박봉우, 문일영, 김하중, 이문환 등 수많은 예술인들이 드나들었으며, ‘쌍과부집’에는 천상병, 찻집 ‘송원’에는 공초 오상순, 그리고 신봉승 등이 담배를 무척이나 즐겼고, 이 찻집의 2층에는 ‘송원기원’이 있었는데 바둑계의 원로 조남철선생이 운영했다고 한다.
음악감상실 ‘돌체’. ‘엠프레스’에는 화가 김청관, 박서보, 문우식, 최기원 등이 즐겨 찾았고, 특히 KBS명화극장의 해설가로 유명했던 조선일보 문화부장 정영일도 그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없어졌지만 음악다방 ‘갈채’, ‘코지코너’, ‘동방살롱’, ‘청산’, ‘도심’, ‘문예살롱’ 그리고 목로주점 ‘명천옥’, ‘구만리’, 할머니집‘, ’도라무통‘ 등도 있었다고 강민 시인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70년대에 들어와서는 또 다른 명동파들이 생겨난다.
50~60년대의 명동파들은 전쟁의 슬픔을 토하고 울부짖었다면 70년대는 유신과 비상사태 등 독재시대를 겪으면서 정치에서부터 예술까지 벙어리로 장님으로 세상을 살아야 했던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게 된다.
그들은 장발과 고고음악, 청바지 등으로 ‘겨우’ 기성세대에 반항을 시작했다. 70년대 충무로의 ‘벤허다방’ 을지로의 ‘타임’ 그리고 명동의 고전음악감상실 ‘르네상스’, ‘하늘소다방’, 경양식집 ‘숲속의 빈터’ 방송인 강석과 김병조가 DJ를 보던 ‘꽃다방’ 그리고 이종환의 ‘쉘부르 살롱’ 등 명동을 중심으로 생긴 그들만의 놀이터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억압에 대해 반항하고 저항했었다.
명동은 우리들의 영원한 추억으로 계속 남을 것
화가 이경식(58세)씨는 “추억은 공간의 연금술사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논리적이면 세월은 감성적입니다. 시간이 과학적이라면 세월은 문학적일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은 디지털이고 세월은 아날로그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듯 우리들의 추억은 시간과 세월과 감성과 함께하는 퍼포먼스입니다. 그래서 명동은 바로 추억의 사진, 추억의 공원, 그 흔적과 자국들은 바로 기억이고 제 자신입니다. 내 젊은 날 옛 연인이나 오래도록 소식이 끊긴 친구와 거닐었던 명동의 무심한 찻집과 가로수들의 기억에는 내 추억의 지문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추억의 지문 때문에 추억은 공간의 연금술인 셈입니다“라고 자신이 겪은 젊은 날의 명동을 회상했다.
박인희의 노래"세월이 가면"이 탄생한 곳도 명동이다. 60년대 명동의 회색빛 낭만시절 모더니스트시인 박인환과 작곡가 이진섭이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즉석에서 5분 만에 시를 쓰고 곡을 붙였다는 이 노래는 아직도 가을이면 생각나는 명곡 중 하나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누가 뭐래도 명동은 청바지, 통기타, 그리고 비틀즈, 세시봉, 엘비스 프레슬리, 고래사냥, 바보들의 행진, 별들의 고향, 오비스 캐빈, 한대수, 사월과 오월, 어니온스, 뚜아에 무아, 장발단속, 신촌, 고고장, 하사와 병장, 러브 스토리, 대연각, 김일, 김기수, 화신백화점, 경춘선, 대성리 여학생 풀장, 김민기, 유신, 비상사태 등과 함께했던 우리들의 영원한 추억으로 계속 남을 것이다.
그리고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뭍이요 /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오 / 눈앞에 떠오르는 친구의 모습 / 흩날리는 꽃잎위에 어른거리오 /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 달리는 기차바퀴가 대답하려나”
그래 우리가 치열했던 혹은 느슨했던 간에 추억의 명동은 흩날리는 꽃잎 위에 지금도 어른거리고 있다.
* 글 이관일 (시인, 대중문화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