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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선 그 아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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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3-08-05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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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선에서 우리들은 청바지에 기타 메고 비록 바다는 아니었지만 조개껍질 묶어 그녀에 목에 걸고, 뚜아에무아와 라나에로스포 그리고 송창식을 그리워했었다.

 

71년을 달려온 경춘선의 마지막 날

 

지난 2010년 12월 20일 11시 40분 청량리 발 춘천행 무궁화호 1873호가 남춘천역으로 서서히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차 안엔 아쉬움을 가득 담은 기관사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경춘선을 사랑해주신 승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잠시 후 71년을 달려온 열차가 정차합니다“ 이렇게 60~70년대 젊은이들의 낭만과 그리움을 싣고 달리던 경춘선 단선철도는 막을 내렸다.

 

경춘선은 1939년 7월 25일 사설인 경춘철도주식회사에 의해 성동역(城東驛)∼춘천 사이의 구간이 개통되었으며, 서울의 시가지 확장에 따라 성동역∼성북역 구간은 철거되고, 성북역을 기점으로 하는 단선철도가 되었다. 그리고 2010년 12월 21일 경춘선의 마지막 열차가 폐지되고, 경춘선 복선전철이 개통되었다.

 

현재 서울에서 춘천 81.3km를 잇는 경춘선 복선전철은 상봉에서 출발하여, 퇴계원, 마석, 가평, 남춘천역 등을 거쳐 춘천역까지 운행되고 있다.

 

당시 젊은이들은 토요일 오후 석유버너 혹은 고체연료 그리고 코펠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었겠지만 냄비도 괜찮았다. 경춘선을 탄다는 설렘이 있었기에. 이렇듯 이런 저런 취사도구를 들고 청량리역 시계탑에 모였었다.

 

지금이야 없어진 교련복에 청바지, 아니면 검정색 물들인 군복바지, 신발은 운동화였지만 군화도 참 많이 신고 나타났었다.

 

여자들이야 남자와 달리 신경을 썼지만 그래도 백보 오십보였다 물론 교련복이나 군화는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물건은 기타였다. 지금이야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당시에는 기차 안에서 담배피우는 것은 물론이고, 음주에 가무까지 허용되던 시절이었다. 또 이런 행동과 모습에 대해 누구 하나 뭐라고 시비 거는 사람이 없었다.

 

MT의 정석

 

청량리에 출발하면 청평과 대성리, 그리고 강촌에서 대부분 하차했다. 물론 춘천도 그렇지만 청평, 대성리, 강촌에 가장 많은 민박과 MT장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78년 당시 명지전문대 디자인과에 재학 중이던 김진(55세)씨는 “우리과는 여학생이 40여 명, 남학생은 6명이었는데 79년 2월 MT를 갔어요. 장소는 강촌 인근의 새터별장이라는 곳에서 3박 4일을 보냈는데 지금도 생생해요. 그때 우리학교 말고도 다른 학교도 몇몇 왔었는데 지금과 비교해보면 MT장소의 환경이 썩 좋은 건 아니었지만 젊었기에 마냥 신나고 즐거웠어요. 특히 당시만 해도 여학생들의 외박이나 음주 등은 매우 어려웠는데 그래서 더더욱 여학생들이 좋아한 것 같아요”라며 그때를 회상했다.

 

자금은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조혜란(57세)씨는 “저는 명동에 있는 계성여고를 다녔어요. 고2 때 걸스카우트 대원이었던 저는 대성리 여학생풀장으로 MT를 갔는데 첫날밤 맹장으로 구급차에 실려 다시 서울로 온 적이 있어 경춘선, 대성리, 여학생풀장은 평생 못 잊고 있어요. 근데 지금도 여학생풀장은 있나요?”라고 깔깔거렸다.

 

그러나 경춘선은 결코 학생들만의 낭만은 아니었다. 경춘선의 지리상 많은 군인들이 이용했다. 휴가 나온 군인들이나 귀대하던 군인들 모두가 경춘선을 이용했다. 그리고 20~30대 직장인들도 경춘선에서 낭만을 즐겼다.

 

특히 휴가 때 제일 많이 이용했었다. 청바지에 기타 메고 비록 바다는 아니었지만 조개껍질 묶어 그녀에 목에 걸고, 뚜아에무아와 라나에로스포 그리고 송창식을 그리워했었다.

 

전쟁과 경춘선

 

하지만 이런 낭만 뒤에는 그림자도 있었다. 지난 1969년 8월 18일자 동아일보의 ‘힘겨워 주저앉은 피서열차’라는 제목의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날 경춘선 막차인 812 열차는 춘천을 떠나 가평에서 이미 만원이 됐으나 청평에서 오백여명의 승객이 밀어닥쳐 초만원이 된데다 또다시 대성리 역에서 피서객을 태워 대성리~마석사이 터널근처 고빗길을 오르지 못했다.

 

이 열차는 고빗길에서 일단퇴행, 다시 고빗길을 넘으려고 세번이나 올라갔으나 번번이 실패, 만원열차에 탄 승객들은 숨이 막히는 더위에 겹쳐 열차가 달리지 못하자 고함을 지르는 등 차안은 한때 큰 혼잡을 이루기도 했다”라고..

 

그러나 경춘선의 가장 큰 아픔은 전쟁일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937년 7월 개통된 경춘선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고통인 한국전쟁을 고스란히 겪었다.

 

수많은 군인과 탄약이 이 경춘선을 통해 전쟁터로 옮겨졌었다. 그리고 포성이 멈추고 전쟁에서 벗어나나 싶었을 때 베트남 전쟁이 우리 앞에 다가왔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이뤄졌던 해외 파병이었던 베트남전쟁 역시 경춘선은 함께했다. 오음리 골짜기에서 훈련을 마친 젊은이들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운명을 예견한 듯 경춘선 열차 밖으로 편지와 돈을 묶어 내던졌다. 돈은 가지되 편지만은 고향으로 꼭 부쳐달라는 그들의 마지막이고 처절했던 부탁이었다.

 

어쨌든 선발대가 예약해 놓은 허름한 민박집에 여장을 풀고, 석양이 지면 곧바로 음주와 대화로 들어간다. 물론 그러한 시간은 대부분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오고 갔던 수많은 ‘우리들의 대화’는 이젠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청량리역 인근만 가도 경춘선의 아리아리한 기억이 남는 것은 우리 모두의 추억일 것이다.

* 이관일(시인,대중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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