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장의 역사, 조선시대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漢城判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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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0-07-02 11:24본문
조선시대에도 지금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직책이 있었으니 바로 ‘한성판윤’이다.
한성판윤은 6조판서와 동등한 정2품의 경관직으로 의정부 좌·우참찬, 6조판서와 함께 아홉대신을 뜻하는 9경(卿)에 포함되는 중요한 자리였다.
지금의 도지사와 광역시장에 해당하는 관찰사와 부윤이 종2품의 외관직이었던 점, 부(府)임에도 불구하고 부윤(府尹)과 구별하여 판윤(判尹)이라 칭했던 점을 보면 한성판윤은 특정지역을 관할하는 직책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성판윤은 궁궐과 중앙관서의 호위 및 도성 치안을 담당하는 중책이기에 매일 편전에서 국왕과 정사를 논하는 상참(常參)에 참여했고, 지금의 행정부시장 격인 종2품의 좌윤과 우윤이 보좌했고, 대체로 판서나 참찬 등 정2품을 지낸 인물이 임명되었고 재임 후에는 대부분 판서(95%가 이조판서)로 이동하거나 승차했다.
한성판윤은 외교업무와 소송업무도 담당했는데 한성판윤이 경관직이고 국정에 참여했던 점, 그리고 삼권분립이 명확하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반영한다.
서울의 행정상 명칭은 조선의 수도가 된 이후 한양부에서 한성부로 바뀌었고, 수장의 명칭은 판한성부사, 한성부윤, 한성판윤 등 십여차례 바뀌었다.
서울의 명칭은 태조 4년(1395년)에 한양부가 한성부로 변경돼 1910년 경술국치 후 경성부로 바뀔 때까지 조선조 511년간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서울 수장 명칭은 판한성부사로 시작돼 한성부윤, 한성판윤, 관찰사, 한성판윤으로 변해왔는데, 예종원년인 1469년에 한성판윤으로 바뀌어 430여년간 일제에 병합될 때까지 사용되면서 한성판윤이 서울 수장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다.
초대 한성판윤은 ‘성석린’(태조4년 1395년)이지만 그의 공식 명칭은 판한성부사이고, 공식명칭으로서 최초의 한성판윤은 ‘서거정’(예종원년, 1469년)이고 마지막은 ‘박의병’(광무9년, 1905년)이다.
서울의 긴 역사만큼 수장의 역사도 깊은데 조선 511년간 1390대에 걸쳐 1,100여명이 거쳐 가면서 역사적인 인물과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한성판윤을 지낸 인물로는 명재상 황희와 맹사성, 명문작가 서거정, 행주대첩의 명장 권율, 오성과 한음의 한음 이덕형, 암행어사 박문수, 실학자 박세당, 개화사상의 선구자 박규수,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한 민영환 등이 대표적이다.
한성판윤으로서의 업적은 도시계획과 건설 분야에서 발휘됐는데, 초대 한성판윤 ‘성석린’은 경복궁 신축, 도성 축조, 청계천 준설 등 도시기반을 다졌고, ‘홍계희’(영조36년, 1760년)는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로 서울 주 배수로의 기능을 회복시켰고, ‘이채연’(광무2년, 1898년)은 간선도로 확장과 도로 위의 쓰레기와 진흙탕을 정비하는 거리정비사업을 펼쳐 근대적 도시 건설의 기초를 다졌다.
한성판윤을 4차례 이상 지낸 사람은 모두 53명인데, 최다 역임한 사람은 ‘이가우’(헌종 5년)로 헌종부터 철종까지 13년 동안 무려 10회나 지내 ‘판윤대감’이라 불렸지만 그의 재임기간을 통산하면 1년 3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
한성판윤을 10명 이상 배출한 가문은 전주 이씨, 여흥 민씨, 달성 서씨, 파평 윤씨 등 모두 25개 가문인데, 최다는 ‘전주 이씨’(43명)이고 그 다음이 여흥 민씨(35명)인데 명성황후의 친정인 여흥 민씨의 경우는 고종대에 20년 동안 민씨 ‘영’자 돌림만 8명이 임명돼 ‘8영’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최단기간 한성판윤은 ‘김좌근’(철종 즉위년, 1849년)으로 임명된 날 오후에 최다 판윤을 지낸 이가우가 새로 임명되면서 한나절에 그쳤고, 고종대에 이기세, 한성근, 임웅준도 하루 만에 교체됐는데, 고종 27년 1890년에는 한해 동안 무려 25명, 고종 재위 43년 7개월 동안 총 385명의 판윤이 나올 정도로 조선 후기에는 단명 판윤이 많았다.
3대에 걸쳐 한성판윤을 지낸 경우는 영조때 병조판서를 지낸 풍산 홍씨 상한과 그의 아들 낙성, 손자 의모가 유일하고, 3부자가 한성판윤을 지낸 경우는 숙종때 영의정을 지낸 달성 서씨 종태와 그의 두 아들 명균과 명빈의 경우가 유일하다.
정조 14년(1790) 12월에 한성판윤 구익은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밖의 국왕 거둥길에 눈을 치우지 않아 파직되기도 했다. 재임한 지 1개월 11일만에 파직된 것으로 이로부터 3개월 뒤에 한성판윤에 다시 임명되었다.
서울은 경술국치 이후 경성부, 해방 후 서울특별자유시, 1948년에 서울특별시로 명칭이 변했고, 수장 명칭은 경성부윤, 서울시장, 서울특별시장으로 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시대에 경성부로 격하된 서울의 수장은 경성부윤인데 22명의 경성부윤 중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해방 후 서울시로 변경 된 이후에는 관선 시장 29명과 민선 시장 4명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수장을 맡았다. 이명복기자
한성판윤은 6조판서와 동등한 정2품의 경관직으로 의정부 좌·우참찬, 6조판서와 함께 아홉대신을 뜻하는 9경(卿)에 포함되는 중요한 자리였다.
지금의 도지사와 광역시장에 해당하는 관찰사와 부윤이 종2품의 외관직이었던 점, 부(府)임에도 불구하고 부윤(府尹)과 구별하여 판윤(判尹)이라 칭했던 점을 보면 한성판윤은 특정지역을 관할하는 직책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성판윤은 궁궐과 중앙관서의 호위 및 도성 치안을 담당하는 중책이기에 매일 편전에서 국왕과 정사를 논하는 상참(常參)에 참여했고, 지금의 행정부시장 격인 종2품의 좌윤과 우윤이 보좌했고, 대체로 판서나 참찬 등 정2품을 지낸 인물이 임명되었고 재임 후에는 대부분 판서(95%가 이조판서)로 이동하거나 승차했다.
한성판윤은 외교업무와 소송업무도 담당했는데 한성판윤이 경관직이고 국정에 참여했던 점, 그리고 삼권분립이 명확하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반영한다.
서울의 행정상 명칭은 조선의 수도가 된 이후 한양부에서 한성부로 바뀌었고, 수장의 명칭은 판한성부사, 한성부윤, 한성판윤 등 십여차례 바뀌었다.
서울의 명칭은 태조 4년(1395년)에 한양부가 한성부로 변경돼 1910년 경술국치 후 경성부로 바뀔 때까지 조선조 511년간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서울 수장 명칭은 판한성부사로 시작돼 한성부윤, 한성판윤, 관찰사, 한성판윤으로 변해왔는데, 예종원년인 1469년에 한성판윤으로 바뀌어 430여년간 일제에 병합될 때까지 사용되면서 한성판윤이 서울 수장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다.
초대 한성판윤은 ‘성석린’(태조4년 1395년)이지만 그의 공식 명칭은 판한성부사이고, 공식명칭으로서 최초의 한성판윤은 ‘서거정’(예종원년, 1469년)이고 마지막은 ‘박의병’(광무9년, 1905년)이다.
서울의 긴 역사만큼 수장의 역사도 깊은데 조선 511년간 1390대에 걸쳐 1,100여명이 거쳐 가면서 역사적인 인물과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한성판윤을 지낸 인물로는 명재상 황희와 맹사성, 명문작가 서거정, 행주대첩의 명장 권율, 오성과 한음의 한음 이덕형, 암행어사 박문수, 실학자 박세당, 개화사상의 선구자 박규수,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한 민영환 등이 대표적이다.
한성판윤으로서의 업적은 도시계획과 건설 분야에서 발휘됐는데, 초대 한성판윤 ‘성석린’은 경복궁 신축, 도성 축조, 청계천 준설 등 도시기반을 다졌고, ‘홍계희’(영조36년, 1760년)는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로 서울 주 배수로의 기능을 회복시켰고, ‘이채연’(광무2년, 1898년)은 간선도로 확장과 도로 위의 쓰레기와 진흙탕을 정비하는 거리정비사업을 펼쳐 근대적 도시 건설의 기초를 다졌다.
한성판윤을 4차례 이상 지낸 사람은 모두 53명인데, 최다 역임한 사람은 ‘이가우’(헌종 5년)로 헌종부터 철종까지 13년 동안 무려 10회나 지내 ‘판윤대감’이라 불렸지만 그의 재임기간을 통산하면 1년 3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
한성판윤을 10명 이상 배출한 가문은 전주 이씨, 여흥 민씨, 달성 서씨, 파평 윤씨 등 모두 25개 가문인데, 최다는 ‘전주 이씨’(43명)이고 그 다음이 여흥 민씨(35명)인데 명성황후의 친정인 여흥 민씨의 경우는 고종대에 20년 동안 민씨 ‘영’자 돌림만 8명이 임명돼 ‘8영’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최단기간 한성판윤은 ‘김좌근’(철종 즉위년, 1849년)으로 임명된 날 오후에 최다 판윤을 지낸 이가우가 새로 임명되면서 한나절에 그쳤고, 고종대에 이기세, 한성근, 임웅준도 하루 만에 교체됐는데, 고종 27년 1890년에는 한해 동안 무려 25명, 고종 재위 43년 7개월 동안 총 385명의 판윤이 나올 정도로 조선 후기에는 단명 판윤이 많았다.
3대에 걸쳐 한성판윤을 지낸 경우는 영조때 병조판서를 지낸 풍산 홍씨 상한과 그의 아들 낙성, 손자 의모가 유일하고, 3부자가 한성판윤을 지낸 경우는 숙종때 영의정을 지낸 달성 서씨 종태와 그의 두 아들 명균과 명빈의 경우가 유일하다.
정조 14년(1790) 12월에 한성판윤 구익은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밖의 국왕 거둥길에 눈을 치우지 않아 파직되기도 했다. 재임한 지 1개월 11일만에 파직된 것으로 이로부터 3개월 뒤에 한성판윤에 다시 임명되었다.
서울은 경술국치 이후 경성부, 해방 후 서울특별자유시, 1948년에 서울특별시로 명칭이 변했고, 수장 명칭은 경성부윤, 서울시장, 서울특별시장으로 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시대에 경성부로 격하된 서울의 수장은 경성부윤인데 22명의 경성부윤 중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해방 후 서울시로 변경 된 이후에는 관선 시장 29명과 민선 시장 4명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수장을 맡았다. 이명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