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대군 이정 태실(月山大君 李婷 胎室)’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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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0-03-25 07:42본문
秋江(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無心(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월산대군 著>
가을 달밤에 작은 배 하나를 띄어 놓고 꼭 무엇인가를 잡겠다는 생각 없이, 한가하고 여유로운 강호의 삶을 한 폭의 동양화처럼 선명하게 제시한 이 작품은 학창시절 교과서에 수록되어 우리에게 친숙한 <추강에 밤이 드니> 라는 시조이다. 이 시조의 주인공, 조선 세조의 장손이자 유명한 시인으로, 평생 달과 산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던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 이정(李婷)의 태(胎)를 묻은 태실(胎室)이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된다.
※ ‘태실’ 이란 왕가에 출산이 있을 때 왕족의 태(태반)를 봉안하고 표석을 세운 곳을 의미하며, 태봉(胎封)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임시로 설치하여 이 일을 맡게 하였다.
월산대군 이정(1454년~1488년)은 추존왕(追尊王) 덕종(德宗)의 맏아들이며, 성종의 형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월산대군은 할아버지인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궁궐에서 자랐다. 17세 때인 1471년(성종 2) 월산대군으로 봉해졌고,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종학(宗學)에 들어가 배웠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하였다. 성품은 침착, 결백하고,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하였으며,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의 시문 여러 편이《속동문선 續東文選)》에 실릴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저서로는 《풍월정집》이 있고 시호는 동생인 성종이 특별히 ‘효문(孝文)’으로 내렸다.
월산대군의 태를 묻어 보관하던 태실은 서초구 우면동 우면2지구 아파트 공사 현장 인근의 태봉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 태비 1기와 석함 1기가 남아 있다. 태비(胎碑)는 묻힌 태의 주인공과 조성시기 등을 기록한 비석인데, 이 태비는 비 몸돌과 비 받침이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 앞면에는 ‘월산군정태실(月山君婷胎室)’이라고 새겨져 있고, 비 뒷면에는 ‘천순육년오월십팔일입석(天順六年五月十八日立石)’이라고 새겨져 있어, 이 비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월산군(月山君)으로 봉해진 해(1460년)로부터 2년 뒤인 1462년에 조성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석함(石函)은 상부가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는데, 원래는 석함 안에 태를 봉안하는 태항아리와 지석이 남아 있어야 하지만, 태항아리와 지석은 현재 일본의 아타카(安宅)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반출시기는 알 수 없다.
원래 조선왕조의 태실은 전국의 풍수 좋은 명당에 흩어져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조선왕조의 태실 대부분을 서삼릉(경기 고양시)으로 모으는 과정에서 대부분 원위치에서 이전되었으나, 이 월산대군 이정태실은 서울지역에서 유일하게 원위치에 원형대로 남아 있는 사례이다.
서울시는 월산대군 이정 태실이 비록 태항아리와 지석(誌石)은 남아 있지 않지만, 오늘날 서울지역에서 원위치에 원형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태실이고, 태(胎)를 신성시하여 명당을 골라 소중히 모셨던 조선 왕실의 안태(安胎) 의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므로 태비와 석함, 그리고 태실군의 핵심을 이루는 태봉산 정상부를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또한 태실 보호를 위해 민간인의 경작이나 땔감하기, 약초나 나물 캐기 등이 엄격히 금지되었던 금표(禁標) 구역으로 추정되는 태봉산 전체를 개발과정에서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동 태실 주변의 역사·문화적 환경을 보존하고자 한다.
이명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