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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1930’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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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3-12-01 06:1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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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문화관(관장 한은희)은 오는 11.29(금)부터 내년 3.2(일)까지 청계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기획전 ‘청계천, 1930’을 개최한다. 개막식은 11.28(목) 오후 3시 청계천문화관(성동구 청계천로 530) 기획전시실에서 진행된다.

청계천문화관은 청계천의 역사와 문화, 생태를 중심으로 한 장소기반 박물관으로서 그 동안 청계천과 주변지역에 대한 다양한 주제의 기획전을 개최하여 왔다.

* 노무라할아버지의 서울이야기(2007), 청계천 판자촌이야기(2007), 청계천에서 만난 사람, 박태원(2009), ‘이억영, 서울실경산수-청계천에서 한강까지’(2011), ‘청계천의 풀꽃, 예술로 피어나다’(2011), 가도가도 왕십리(2012), 청량리(2013) 등

이번 전시회는 1930년대 서구 근대문명이 들어와 근대도시로 발전하는 과정 속에 고민하던 청계천의 이야기를 청계천변에 살면서 근대도시 경성(京城)과 청계천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남긴 사실주의 작가 박태원(朴泰遠,1909~1986)이 화자(話者)로 등장하여 전시를 안내한다.

박태원의 작품 속에 나타난 천변풍경은 그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다분히 일상적인 도시의 배회이지만, 동네 이발소, 오색등이 화려한 카페, 현기증 나는 승강기가 있는 백화점, 거리의 적막을 깨는 자전거와 인력거 등 근대도시 요소들로 환기되어 있다. 반면에 청계천 다리 밑의 깍정이(거지)들과 맑고 깨끗하다는 이름과는 달리 구정물이었던 청계천 등 당시의 현실을 숨김없이 반영하고 있다.

그의 눈을 통해 들어온 사실적인 청계천의 모습을 통해 당시 청계천이 갖는 의미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 위해 이번 전시회가 기획되었다.

또한 2015년 9월 26일 개관 10주년을 앞두고 청계천전문박물관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청계천,1930’전은 총 4개의 대주제와 7개의 소주제로 구성되었으며, 박태원의 ‘천변풍경’과 당시 생활상을 알려주는 서양식 복식과 1930년대 인기담배였던 마코와 피죤, 인삼커피, 도시의 확장에 초점을 둔 조선시가지계획령의 시행(1936)의 영향으로 인한 청계천변 사람들의 삶과 관련된 사진자료 등 총 57건 106점의 관련 유물들이 소개된다.

또한‘천변풍경’소설의 내용과 전시자료를 매칭(matching)기법을 사용하여 전시함으로써, ‘천변풍경’ 소설 속 장면들을 전시실로 옮겨 놓아 관람객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재미도 솔솔할 것으로 생각된다.

전시내용과 주요 유물은 다음과 같다.

1930 청계천, 모던의 산책을 시작하다

박태원의 ‘천변풍경’ 첫 페이지의 장면인 청계천 빨래터로부터 시선을 옮겨 도시의 모던산책에 동행하는 부분이다.

청계천에 새로운 바람이 불다 : 서양과 일본을 통해 들어온 근대문물은 도시의 공간을 바꾸고, 사람과 생활을 바꾸는 ‘변화의 바람’이었다. 청계천을 경계로 나뉜 남촌과 북촌의 거리에는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활보하고, 백화점과 다방 등의 근대공간이 생겨나 도시를 유혹하였다. 청계천 주변은 새로운 근대문명의 경험지이자 경계로 자리잡고 있었다.

도시의 확장과 가로망의 변화 : 1920년대 후반부터 도심의 가로망이 조선시대의 동서축에서 ‘조선총독부-경성부-조선은행(현재 한국은행)-용산’을 잇는 남북축으로 재편되면서 식민지의 부(富)와 권력은 1930년대에

들어와 황금정(黃金町,현재 을지로)과 본정(本町,현재 충무로)을 중심으로 안정적으로 정착되었다. 또한 1934년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법인 조선시가지계획령이 시행되면서 시역(市域)이 확장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공간변화를 넘어 청계천의 남쪽인 남촌은 일본인, 북쪽인 북촌은 조선인이라는 거주민 구성의 변화와 미관적·위생적 도시를 표방한 토막(土幕)의 철거로 위협받는 도시빈민층의 주거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신문물의 유입 : 개항기開港期 이후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문물西洋文物은 일제강점기에 와서 더욱 대중화되어 일상생활 깊숙이 자리잡았다. 신문물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었다. 서양식 차림을 한 모던세대가 등장하여 거리를 활보하고, 화장품과 향수, 커피와 홍차, 맥주와 포도주, 초콜릿, 캐러멜 등의 서양과자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1930년대 중반 일반화된 유성기留聲機로부터 흘러나오는 음악은 사람들을 사색思索에 잠기게 하고, 때론 춤추게 했다. 이와 같이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서구西歐의 신문물은 천변川邊을 근대의 경험이 가득한 근대문명의 경험지로 만들었다.

빛과 그늘 사이, 청계천이 흐르다 : 근대의 경험이 가득한 신천지新天地의 시대에도 빛과 그늘이 존재했다. 그 가운데에 청계천이 있었다. 청계천을 경계로 남쪽에 위치한 남촌은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청계천의 북쪽에 위치한 북촌은 주로 조선인이 거주하였다.

남촌의 거리는 근대 건축물과 시설로 번영을 이어갔고, 이에 반해 북촌은 화려하고 번화한 남촌을 지향해야하는 전근대적이고 낙후된 곳으로 인식되었다. 청계천은 남촌과 북촌을 가르는 지리적 경계일 뿐만 아니라 사람과 공간, 문화까지 나누는 차별적 경계선이었다.

번화한 도시의 중심, 남촌 : 본정本町으로 대표되는 남촌은 내지인內地人(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식민정부를 위한 가로망이 확장·신설新設되어 근대적 도시기반시설을 갖추게 되었으며, 신식상점新式商店과 백화점百貨店,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조선은행朝鮮銀行 등 식민지적 금융기관이 위치한 상업과 금융의 심장부를 이루었다. 또한 다방과 카페의 출현으로 근대유흥문화와 예술의 공간이었다.

근대유흥문화의 출현, 다방과 카페 : 근대도시의 유흥문화는 다방과 카페로 대표된다. 1920년대부터 남촌에 생기기 시작한 다방과 카페는 1930년대에 가장 성행하였으며, 북촌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흥미롭게도 당시의 다방과 카페는 확연히 구분되었다. 다방은 차를 마시고 쉬는 장소이자 예술인들의 작품 전시회나 발표회가 열리는 종합예술의 장소로 다양한 분야의 문화활동이 전개되었다. 한편 카페는 술과 웃음을 파는 유흥문화의 첨병尖兵이었다. 남촌의 ‘은좌銀座’(본정本町, 현재 충무로),‘바론baron’(영락정永樂町, 현재 저동), ‘마루비루丸ビル’(명치정明治町, 현재의 명동) 등이 유명하였다.

암울한 현실과 낙후, 북촌 : 번화한 남촌과는 달리 북촌은 ‘낙후된 경성의 모습’으로 투영投影되었다. 도로의 신설과 확장 등의 도시기반시설은 혜화동과 율곡로 일대에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생계를 위해 상경上京한 사람들이 천변에 정착하여 도시빈민층을 형성하면서 청계천은 그들이 배출한 생활하수로 더욱 오염되고, 전염병과 살인사건 등 범죄犯罪의 온상溫床이 되면서 북촌은 점점 암울한 현실과 마주하고 낙후되어갔다.

불결한 탁계천 : 청계천의 불결한 위생상태는 사회적 논점이었다. 생계를 위해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이 청계천변에 도시빈민층을 형성하면서 청계천의 상태는 급속하게 악화되었다. 무분별하게 버려지는 생활하수와 배설물, 쓰레기로 청계천의 빛깔은 점점 어두워져만 가고, 전염병 발생의 근원이 되어 청계천은 북촌 발전에 저해沮害가 되는 사회적 암종癌腫으로 전락하였다.

사건사고로 얼룩진 위험천만의 청계천 : 1920년대부터 1930년대 ‘매일신보每日申報’, ‘동아일보東亞日報’, ‘조선일보朝鮮日報’ 등의 신문지상에는 청계천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가 빈번하게 등장했다.

좁은 천변도로로 인한 추락사고와 청계천 주변 카페에서 일어나는 폭행사건, 청계천에 버려진 시체와 살인사건 등 이 무렵 청계천은 온갖 사건사고로 얼룩져 있었다. 이러한 사건사고는 일제의 무관심과 회피로 인한 북촌의 낙후를 배경으로 근대유흥문화의 이면裏面과 도시빈민들의 어려운 생활상을 나타내주고 있는 시대상이었다.

청계천, 이중성의 시공간이 되다 : 1930년대 청계천은 근대화과정에서 여러 단면斷面을 보여주고 있다. 청계천은 신구문물, 근대와 전근대,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로 인한 민족적 대립 등 이중성의 얼개로 이루어진 공간과 시간의 연속무대이자 경계로 작용하였다. 북촌에는 조선인, 남촌에는 일본인이라는 구성원의 대비와 근대의 변화과정 중에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의도된 차별적 정책과 맞물리면서 전통적으로 우세했던 북촌의 위상을 남촌에게 넘겨주었다. 즉 청계천은 북촌과 남촌을 구별하는 지리적 경계를 넘어 그 곳의 공간과 사람을 바꾸고, 도시를 바꾸는 차별적 경계선이었다.

이와 같이 1930년대 청계천은 근대문명의 수용과정에서 흔들리는 역사의 무대였으며, 남촌과 북촌을 나누는 자연지리적 경계를 넘어 사회적·공간적·민족적 경계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삼아 청계천의 역사와 의미를 되새겨보는 기회와 청계천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장場이 마련되기를 기대해본다. 김판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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