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 멘탈’ 류현진, 더 이상 ‘롤러코스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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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4-04-11 11:33 댓글 0본문
야구팬들이 느긋하게 침대나 소파에 누워서 TV 중계를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편안한 야구를 ‘침대야구’ ‘소파야구’라고 부른다.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가 투수라면 굴곡 없이 던지는 안정된 투구가 팬들을 침대로, 소파로 눕게 만든다. 더욱이 주말 아침이라면 모닝커피 한잔에 미국메이저리그(MLB) 경기를 느긋하게 시청하는 그 맛이란….
LA 다저스의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27)이 지난해 국내 팬들에게 그런 느긋한 시청의 재미를 꾸준히 선사했다.
4월 첫째 주말을 시작하는 지난 5일 아침. 중계를 보던 국내 야구팬이라면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뛰쳐나오거나 소파에서 자세를 곧추세웠으리라. 믿었던 류현진이 1,2회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으니. MLB에 데뷔했던 지난해에도 1,2회에 약한 징크스가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충격과 경악이었다. 류현진이 LA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MLB 홈 개막전에 선발 등판해 2이닝 8실점(6자책점)하며 시즌 첫 패를 당했던 것이다. 류현진은 69개 공을 던진 뒤 2회를 마치고 강판됐고 팀은 끝내 4-8로 패했다.
1회초에만 무려 6실점하자 다저스 해설자 빈 스컬리는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는 표현까지 썼다. MLB 데뷔 이후 한 이닝 최다 실점, 한 경기 개인 최다 8실점. 최악투였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2014 MLB 시즌 개막 이후 12이닝 연속 무실점의 완벽투를 펼쳐 ‘에이스 클래스’라는 찬사를 받기 시작한 류현진이 이렇게 초반에 무너질 수 있을 것인지.
야시엘 푸이그의 지각으로 야기된 외야진의 급작스런 변동 속에 팀 분위기부터 어수선했다. 1회 2사 이후 급기야 내·외야수 가릴 것 없이 모두 혼비백산, 실책을 쏟아내는 가운데 류현진은 최악의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했다.
지난해만해도 동료들이 실책을 저질러도 그 위기를 병살로 처리하거나 루킹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등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으로 팬들을 안심시켰던 그였다. 지난해 내셔널리그 ‘병살유도 2위’의 난관 극복도 이날처럼 팀 케미스트리가 무너져 총체적 부실이 발생했을 때는 속수무책.
그러나 시즌 첫 패를 당한 뒤 인터뷰장에 나온 류현진은 “전체적으로 내가 잘못 던졌다”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이어 “호주 개막전에 이어 원정 개막전까지 등판했다. 두 경기에서 괜찮았는데 믿어준 감독과 홈팬들께 믿음을 못준 것 같다”고 했다.
수비진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없었다. 발톱 부상 핑계도 없었다. 의연하게 자신의 최악투를 인정했다. 그의 ‘강철 멘탈’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번 시즌 류현진은 여전히 3선발이지만 ‘개막 전문’ 선발투수로 다저스의 ‘간판’이 됐다. 그에겐 ‘호주-본토-홈’ 개막시리즈가 최상과 최악을 한꺼번에 안겨준 ‘롤러코스터’였다. 2주간 6경기 중 3경기나 선발로 나서는 강행군 속에 값진 소득도 얻었고 소중한 실패도 맛봤다.
출발은 좋았다. 지난달 23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MLB ‘국외’ 개막 2차전에서 선발 등판해 5이닝 2안타 1볼넷 5탈삼진 무실점 호투로 7-5로 이기면서 첫 승을 따냈다.
그러자 미국 스포츠매거진 스포츠일러스트레이트는 ‘MLB에서 가장 저평가된 선수’로 류현진을 꼽았다. “통통한 도우(반죽)처럼 생겼지만 그는 진짜 스포츠선수다. 전체적인 구질도 매우 좋고 특히 커브가 매우 좋다. 그는 3선발이며 그가 퇴보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며 ‘2년차 징크스’ 없이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지난달 31일에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본토’ 개막전에 선발등판하는 영광을 누렸다. 부상자 리스트에 오른 1선발 크레이튼 커쇼 대신 나서 7이닝 3안타 3볼넷 7탈삼진 무실점으로 쾌투를 펼쳤다. 1회 1사 만루, 2회 무산 1.2루 위기를 실점 없이 극복한 뒤 3회부터 16타자 연속 범타로 처리했다. 호주 개막전에서 주루 도중 당한 발톱 부상의 후유증도 불식시킨 완벽투였다.
구원투수 브라이언 윌슨의 예기치 못한 ‘불쇼’로 1-3으로 역전패해 2승이 허공에 날아갔지만 이날 미국 전역에 류현진의 활약상이 생생히 중계돼 그는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하며 강인한 인상을 던졌다. 미국 CBS는 “류현진의 보석같은 피칭이 바람에 날아갔다”고 전했고 다른 미국 언론들도 에이스급 활약에 찬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나흘만 쉬고 등판한 홈 개막전에서 최악의 상황을 경험해야 했으니 이때까지 팀 선발등판의 절반을 소화한 류현진의 혹사 논란이 나올 만도 했다.
호주 개막 2차전 5이닝 무실점과 발톱 부상의 희비. 본토 개막전 선발 영광과 7이닝 무실점에도 불펜 난조로 무산된 2승의 아쉬움. 홈 개막전 2이닝 8실점 악몽.
류현진이 2주간 세 차례 개막시리즈에서 맛본 롤러코스터 경험은 그가 더욱 탄탄하게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국내 프로야구에서도 많은 위기를 헤쳐나가는 역투를 보여줬던 류현진이다.
그는 2012년 7월 18일 대전 삼성전에서 자신의 최다실점인 2이닝 8실점을 기록했다. 그때는 8자책점으로 이번 악몽보다 더했다. 그러나 곧바로 다음 경기인 24일 대전 롯데전에서 혼신의 피칭으로 기어코 완투승을 따냈다. ‘강철 멘탈’이란 이야기를 들었던 그다.
‘멘탈갑(甲)’으로도 불리는 그의 초긍정 마인드는 그를 지탱해온 버팀목이기도 하다. 기자회견에서 최악의 실패를 곧바로 인정하고 다음날 훈련장에서 절친한 동료 후안 유리베와 춤을 추는 사진이 외신을 통해 전해졌다. 아픈 기억을 빨리 잊고 앞만 바라보며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쿨한 류현진이다.
그를 발굴해 키운 김인식 한국야구위원회(KBO) 규칙위원장은 제자의 이번 개막시리즈를 지켜보면서 이런 얘기를 전했다. 류현진이 한화에서 활약할 때 무실점이나 1실점하고도 타선의 지원을 못받아 승리를 거두지 못하자 당시 김인식 감독이 조언한 말이다.
“타선의 지원에 신경쓰지 마라.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최선을 다하라. 너는 충분히 능력이 있다.”
혼자서도 경기를 지배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기에 그를 믿었고 그 믿음에 류현진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확고한 자기 믿음으로 슬럼프 없이 지난해 MLB에서 14승8패 평균자책점 3.00의 성공 스토리를 썼다.
더욱이 류현진은 도전을 회피하지 않는다. 부상도 있었지만 2선발 잭 그레인키가 호주 원정을 꺼려한 가운데 대신 호주를 다녀왔다. 발톱 부상 재발 우려에도 본토 개막전 등판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나흘 휴식 뒤에도 홈 개막전 등판까지 강행했다.
기술적으로 승부구가 진화한 것은 이번 개막시리즈에서 팀과 팬에게 선사한 최대의 믿음이다. 지난해보다 일찍 스프링캠프에서 착실히 준비한 끝에 호주 개막시리즈 때부터 ‘폭포수’ 커브를 선보이며 위력을 더한 승부구가 그것이다.
본토 개막전에서 패스트볼과 체인지업에 슬라이더, 커브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이 4가지 구종을 결정구로 다양하게 활용해 7개의 삼진을 솎아냈다. 돈 매팅리 다저스 감독은 “모든 구종을 효과적으로 던졌다. 슬라이더와 커브가 향상됐다”고 평했다.
적장 버드 블랙 샌디에이고 감독조차 “4회부터 류현진은 4가지 구종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한 시간은 괴로웠다”고 인정했다.
특히 주전포수 A.J.엘리스는 “류현진이 지금까지 등판 중 가장 예리한 커브를 구사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호주 개막시리즈 때 체인지업 스승인 구대성(시드니 블루삭스)을 만나고 온 뒤 커브의 낙차는 더욱 커졌다.
지난해 그의 필살기는 체인지업이었다. 미국 ESPN은 본토 개막전을 앞두고 “류현진은 지난해 체인지업으로 큰 효과를 봤는데 어떤 선발투수보다 효과적이었다. 시즌이 지날수록 더욱 좋아졌다”고 평했다. 올해는 그 체인지업 외에 또 하나의 결정구로 폭포수 커브가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막 시리즈를 마친 그의 성적은 1승1패 평균자책점 3.86이다. 아직 ‘1회 징크스’, ‘천적 샌프란시스코 트라우마’, ‘낮경기 징크스’ 등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지만 자기 자신을 믿고 2점대의 평균자책점 목표를 향해 꿋꿋이 나아가는 ‘믿음의 역투’가 다시 기대된다.
타선이 도와줘야 쌓을 수 있는 승수보다 자신은 물론 팬, 감독의 믿음을 확인시켜주는데 더 없이 좋은 게 낮은 평균자책점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는 류현진이기 때문이다.
평균자책점이 0.00에서 단 하루에 3.86으로 훌쩍 치솟았지만 매팅리 감독이 이제 5선발 체제로 가겠다고 공언한 만큼 류현진은 시즌을 길게 보고 다시 힘을 추스릴 수 있게 됐다. 류현진의 혼을 담은 투구가 기대되는 이유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의 롤러코스터는 없을 것이다. *김한석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