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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정책과 ‘정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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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09-10-06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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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덕룡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하버드 대학에서 오랫동안 철학을 가르쳤던 존 롤스(John Rawls)교수는 ‘정의론(Theory of Justice)’라는 책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 책에서 제도적 공정성을 기준으로 정의가 무엇인가에 관심한다.

모든 사람들은 기득권이나 존재구속성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그 결과 각자가 상정하거나 주장하는 정의의 내용은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롤스 교수는 ‘주변의 모든 상황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고 심지어 자신의 능력이나 환경에 대해서도 모르는 상태’를 가정한다. 이런 가정 하에서 사람들이 선택하는 제도가 가장 공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정의롭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한 결론은 두 가지의 원칙으로 요약된다. 첫째,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다. 모든 존재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최대한 자유를 누려야 하며 이 권리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철학자 존 롤스 “최약자층의 이득 키우는 것이 정의”

둘째, ‘기회균등의 원칙’을 기반으로 하되 불평등을 피할 수 없는 경우 ‘최약자층의 이득 극대화 원칙’을 기준으로 한 차등의 원칙이다. 즉, 모든 사람에게 최대한 균등하게 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어쩔 수 없이 차별적인 대우를 해야 할 경우 사회 내에서 가장 낮은 계층의 이득을 극대화해야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롤스의 정의론을 새삼 생각해 보는 이유는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서민정책과 그를 둘러싼 논쟁 때문이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서민계층이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생활환경에 노출되고 있어서 나라마다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영국은 최하위 계층의 세 부담 경감을 위해 수백만 명의 저임금 계층을 대상으로 27억 파운드 규모의 감세효과를 발생하는 세제개혁을 단행하였다. 독일은 저소득 자녀양육가정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비과세 한도를 확대하고 실업보험료 감면 등의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일본도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감세와 신용경색으로 어려움을 겪는 영세업체 구제에 자금을 투입하는 등 다양한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대책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첫째는 경제위기를 기회로 드러나고 있는 제도적 약점들을 보완하는 차원이며 둘째는 취약계층의 부담을 한시적으로 경감하기 위한 대책측면이다.

영국, 독일 등 친 서민정책 앞다퉈 추진

미국의 의료보험 개혁은 취약한 제도를 개혁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은 국민의료보험이 없다. 모두 상업보험회사에서 제공하는 의료보험이다. 상업적 이득을 추구하는 보험의 속성상 의료보험료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인 가운데 약 4600만 명 가량이 보험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저소득 가구의 의료문제가 한때 식코(Sicko) 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미국 건강보험제도의 취약성이 전 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오바마 대통령이 의료보험 개혁을 추진하려고 들자 미국사회가 양분된다고 할 만큼 엄청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직접 뉴욕타임스에 ‘우리는 왜 건강보험을 개혁해야 하는가’라는 기고문을 싣고 대국민 설득에 나서고 있다. 미국민의 70%가 의료개혁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설문조사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반대의 목소리가 높은 것은 비용 때문이다. 의료 개혁을 위해서는 향후 10년간 1조 달러라는 엄청난 돈이 들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결국 세금인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서민정책이 사회적으로 논란을 빚게 되는 것은 롤스의 이론을 빌리자면 ‘차별적 정책’이기 때문이다. 특정 계층에 대하여 더 많은 수혜가 있게 되고 비용부담도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서민정책 비용 누가 댈 것인가… ‘정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국에서도 최근 다양한 서민정책이 제시되고 있다. 금융, 교육, 의료, 주거, 영세상인, 여성 등 사회내 취약계층에 대해 한시적으로 부담을 경감하는 정책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취약한 것으로 생각되던 제도들도 서민정책 차원에서 개혁이 추진되고 있다. 서민들의 제도권 금융에 대한 접근성을 제고하기 위해 생계비 대출제도를 신설하고 차상위계층의 영유아에 대한 보육 및 교육비를 전액 지원하기로 했다. 학자금 대출의 이자율도 낮추고 졸업 후 취업시까지 상환을 유예하도록 제도를 손질했다.

저소득계층에 대해 의료 보험료를 낮추고 난치성 질환자에 대한 본인부담율도 획기적으로 낮추었다. 더 나아가 집없는 서민들의 주거안정을 위해 전세금 대출을 확대하고 장기적으로 적은 가격으로 주택을 구입할 수 있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서민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소득·고용·교육·주거·안전 등 ‘민생 5대 지표’를 새롭게 개발해 수시로 점검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이러한 서민정책 역시 차별적 정책이다. 어떤 서민정책이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차별적 정책이 국민들에게 충분히 납득될 수 있어야 한다.

서민정책의 본질은 존엄성 지키기

다시 롤스 교수의 ‘정의론’으로 돌아가 보자. 그의 이론에 따르면 차별적 정책으로 분류할 수 있는 서민정책이 국민들로부터 정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회 내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의 이득을 최대한 제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취약계층의 복지를 무제한적으로 확대하는 것은 사회 내에 도덕적 해이를 불러오고 경제 내에 고비용 구조를 만들 우려가 있다.

서민정책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기본적 목표는 생존보장이다. 사회내의 구성원이 스스로 자신의 생존을 영위할 능력이 없다면 공동체가 함께 구성원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 목표는 인간적 존엄성의 보호가 될 것이다. 스스로 인간적 존엄성을 지킬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사회가 그 존엄성을 지켜주자는 것이다.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기준은 사회마다 개인마다 시기마다 판단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생존을 위해서도 충분한 보장이 제공되지 않는 사회다. 경제위기가 한풀 꺾이자마자 정부가 서민정책에 힘을 쏟는 이유다. 비용부담자와 수혜자가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서민정책의 실천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이다. 적어도 우리 사회 내에서는 능력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건 생존이 보장될 수 있다면 갈등이 훨씬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정의로운 사회로 한걸음 더 나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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