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달, 6월의 단상(斷想)-′월튼워커′ 장군을 기리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작성일 19-06-03 17:12본문
* 글 권영우 기자
푸르르고도 푸른 저 산야의 녹음을 보고 있노라면 언제적인가(!) 기억 너머로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그때가 새삼 떠오른다.
분단의 아픔을 글로 쓰고, 그림으로 통일을 노래하던 학창시절이 떠오른다.
그리고 자신의 젊음을 위해 국가에 봉사하는 장병들을 위한 위문편지를 쓰던 기억도 아스라이 떠오른다.
몇 일전 지인과 저녁자리를 하며 늦은 시간까지 이런저런 얘기도중 술을 먹고도 집에 들어갈 때 집근처에서 경례를 하고 집으로 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분은 평범한 말단병장으로 군 복무를 한 분으로 아직도 군 복무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꼰대 중의 꼰대였다.
우스게 소리로 착각하여 재차 물었더니 발끈하시며, 진짜라고 확언을 하는 모습에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사실 시끄러운 나라얘기보다도 한사람의 군인정신의 표상인 거수경례를 술 먹고도 경건하게 하고 들어간다는 얘기에 귀가 솔깃했다.
사실의 내용은 이러했다.
서울 도봉역 근처에 월튼 미8군 사령관의 전사지가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 야밤에 지인을 모셔다 드리기 위해 집근처인 도봉역으로 향하던 차에 워커장군을 보고가자는 제안에 거나하게 취한 두 지인과 함께 차를 몰아(필자는 금주자) 도봉역으로 향했다.
이윽고 도로 옆에 볼품없이 초라하게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소리 없이 서있는 4성장군의 전사지를 뜻하지 않게 마주하게 됐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안내를 받아 추모석 앞으로간 우리는 차렷~ 경례.. 짧은 인사를 하고서 헤어졌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미국의 4성 장군이 왜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해야했는가 궁금해졌다.
이튿날 인터넷을 찾아보니 월튼 워커 사령관에 대해서 쉽게 히스토리를 찾아볼 수 있었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한국은 무조건 지켜야한다!″ 는 명언을 남긴 미국의 장군이었다.
조금더 그분의 전사를 알아보았다.
월튼 워커 장군은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제 5보병 사단 기관총 대대의 중대장으로 참전해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에는 제3기갑사단장으로 참전해 ′유령군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공을 세웠고, 북아프리카 전투에서는 독일 제3제국 국방국인 롬멜 부대와의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우리나라와의 인연은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자 7월 7일 일본 동경에서 대전으로 넘어와 13일 정식으로 미 제8군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월튼 워커가 부임할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에 미군은 유엔군의 철수를 주장하며 전쟁을 패배로 간주하던 상황이었다.
* 월튼워커 장군 동상
- ″무슨일이 있어도 후퇴란 있을수 없다″
하지만 ″최전선에서 낙동강전선을 사수하자″며, 남한 사수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월튼 워커장군은 당시 한국장병들을 만나 이런 말을 전했다고 한다. ″내가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그리고 미국 장병들에게 아래와 같은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우리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무조건 지켜야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이에 한 부하가 반론을 제기도 했지만, 맥아더 장군이 월튼 워커장군의 지휘명령을 옹호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전세는 열악한 상황.. 월튼 워커 장군은 굴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악전고투했다.
그러던 중 때마침 터키군 중장인 ′타흐신 야즈즈′가 이끄는 터키 지원군의 지원을 받아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맥아더 장군의 낙동강 전선 시찰이 이뤄졌고, 시찰 이후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워커 중장은 맥아더장군을 도와 인천상륙작전까지 성공시키는 무훈을 세웠다.
만일 월튼 워커 장군이 끝까지 낙동강전선을 사수하지 않았더라면,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은 시작조차하지 못했을 것이다.
- 월튼 워커 장군에게 거수경례를 보낸다.
장군은 1950년 12월 23일 아들인 샘 워커 대위의 ′은성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해주러 가는 도중,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순직하고 만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권모(남 74세, 현재 도봉동 거주)씨에 따르면, ″장군은 장대비가 쏱아지던 날 밤 미군 찝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차량바퀴가 웅덩이에 빠지면서 목재 전신주를 들이받고 그 자리에서 순직하셨다″고 했다.
지금의 월튼 워커 전사지 비석이 세워진 곳이 바로 그 곳이었다.
올해는 월튼 워커 사령관이 세상을 떠난 지 69주기가 되는 해이다.
월튼 워커 사령관의 군인정신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와 국민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몇 해전(16.09.13)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주인공 맥아더장군에 허리우드의 리암니슨이 캐스팅되어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는데, 낮선 땅 대한민국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국군장병과 또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파병장병들에게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마음을 다해 경건한 거수경례를 보낸다.
- 이전글대한산부인과의사회 “바캉스용 생리 지연, 예정일 7일 전부터는 복용 시작해야” 19.07.01
- 다음글도선대사님의 답산가(踏山歌)에 담긴 뜻과 노고산 비득재와 부소천이 전하는 대한겨레의 미래 19.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