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장애인 특별채용 5급 공무원 된 지정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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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1-01-10 08:56본문
중증장애인 특별채용’으로 우리나라 장애인들에게도 최고위 공직자가 될 가능성이 열렸다. 지체장애인 지정훈씨는 2010년 이 특채를 통해 합격한 첫 5급 공무원이다. 특허청 심사관으로 새출발하는 그를 만났다.
“한국에서 시각장애인은 안마사나 역술인밖에 할 수 없었지만 나는 4성 장군에 해당하는 미국 연방정부의 공직자로 이 자리에 섰다.”
미 백악관 국가장애인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지낸 강영우 박사(시각장애인)가 지난 2006년 백악관에서 한 연설이다. 하지만 이제 이 연설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중증장애인 특별채용’으로 우리나라 장애인들도 최고위 공직자가 될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이다.
지리산 종주, 홀로 상경 아르바이트도
“제가 잘해야 나중에 다른 사람들도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책임감이 큽니다.”
새해부터 특허청 정보통신심사국에 5급 사무관으로 근무하는 지정훈(32)씨의 소감이다. 그는 검색기술, 프로그래밍 언어 등 컴퓨터와 관련된 특허기술을 심사하는 업무를 맡게 된다. 컴퓨터공학 박사 출신인 그는 “전공과 일치하는 분야를 맡게 돼 다행”이라며 “사명감을 가진 공직자가 돼 좋은 선례를 남기고 싶다”고 했다.
지씨는 뇌성마비 후유증으로 인해 팔이 불편한 3급 지체장애인이다. 돌도 지나기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장애는 받아들이되, 스스로 극복하기’를 강조했다.
어차피 사회에선 일반인과 경쟁해야 하는 만큼 힘들어도 견뎌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린 아들에겐 벅찬 선택이었지만, 결국 그게 옳았다. 지씨는 “부모님께서 ‘또래들과 어울려야 많이 배울 수 있다’면서 일반학교로 보내셨다”며 “그 덕에 컴퓨터 전문가가 되겠다는 인생의 목표를 정할 수 있었다”고 했다.
“팔이 불편하니까 글씨가 삐뚤삐뚤 써지고 그나마 알아보게 쓰려면 시간이 더 오래 걸렸어요. 수업 내용을 적어야 나중에 공부하고 시험도 볼 수 있으니까 이를 꽉 물고 오기로 썼죠 .”
공부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필기
지씨는 재활훈련에 몰두했다. 근력 운동을 통해 팔에 힘을 길렀고, 맨손 대신 컴퓨터 자판으로 글 쓰는 연습을 했다. 그 덕에 자판과 마우스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됐다. 그는 “컴퓨터로 업무를 보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
1998년 경성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자판과 마우스를 쓸 줄만 알았지 컴퓨터를 전혀 모르는 ‘컴맹’이었기에 다른 동기들보다 2배, 3배 노력하는 길밖에 없었다”고 했다. 4년 내내 아침 9시부터 꼬박 12시간 동안 실험실에 틀어박혀 지냈다.
2005년 석사학위를 받았고 부산대 컴퓨터공학과에서 5년 반 만에 박사학위를 땄다.
그에게 장애란 ‘약간의 불편함’일 뿐이다. “어떤 일을 할 때 20퍼센트 정도의 노력이 더 필요한 겁니다. 장애가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주변에서 바라보는 분들의 편견일 뿐입니다. 불편함도 익숙해지면 편해질 수 있습니다(웃음) .”
그는 자신이 “긍정적”이라고 했다. 그러곤 “장애를 떠나서 모든 일을 할 때 자신감이 가장 중요하다”고도 말했다. 그의 세상을 향한 끝없는 도전일지를 보면 이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대학 1학년 때 발톱이 빠지는 고통을 참아내며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를 해냈고, 2학년 때는 휴학하고 홀로 서울에서 자취하면서 효성중공업 개발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2007년 삼성전자가 주최한 휴먼테크 논문대상에 응모해 동상의 영예를 안았다 .
당시 논문대상은 개인정보를 철저히 숨긴 블라인드 심사가 이뤄졌는데 수상자 발표 때 심사위원들은 지씨가 장애인임을 안 후 깜짝 놀랐다고 한다. 대학원 졸업반이었던 2009년 3월, 부산시교육청에 있는 컴퓨터 관련 ‘정보영재원’에서 학생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기도 했다. 무슨 일에서든 주도적으로 해내고야 마는 성격이어서 학창시절 그의 별명은 ‘선수’였다 .
시각장애인 등 함께 합격한 동료 14명은 ‘희망’의 증거
공무원이 된 것 또한 지씨에게 새로운 도전이다.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준비하던 중 행정안전부의 ‘중증장애인 특별채용시험’ 공고를 보게 됐다. 순간 ‘12년 동안 공부해 온 지식을 활용해 보자’는 생각이 들어 그의 가슴이 떨렸다고 한다. 지씨는 자신이 “첫 이력서에 합격한 억세게 운 좋은 케이스”라고 웃었다 .
지씨와 함께 중증장애인 특채에 합격, 올해 행정안전부, 고용노동부, 환경부 등 13개 부처에 배치될 사람은 총 14명이다. 복지시설에서 컴퓨터를 이용한 장애인 자활사업을 전개해 온 시각장애인 청년, 휠체어를 끌고 중증장애인을 방문해 컴퓨터강의를 해 온 여성강사,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다 6-시그마 등 기업혁신 활동을 중소기업청에 적용해 보겠다는 지체장애 1급 장애인 등 경력도 다양하다. 이들 모두는 다른 장애인들의 ‘희망’의 증거가 됐다.
특히 지씨는 ‘중증장애인 출신 첫 5급 공무원’이기에, 주변의 관심이 쏟아져 부담스러울 법도 하다. 지씨는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공직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명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전공을 살려서 국가나 국민의 이익에 보탬이 되는 좋은 공직자가 되겠다”고 했다. 이런 ‘좋은 특채’들이 이어진다면 앞으로 10년, 20년 후쯤 우리나라에서도 ‘한국판 강영우 박사’가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볼 일이다.
황보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