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과 장진호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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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4-12-24 14:11본문
2011년 4월 25일자 <조선일보>에는 美헐리우드 감독 에릭 브레빅과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이 감독은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한 ‘혹한의 17일’이라는 영화를 제작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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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터뷰에서 장진호 전투를 담은 영화를 제작 배경에 대해 “잊혀진 전쟁을 세상에 알리고 동료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용감한 병사들을 기리고 싶다. 전쟁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영웅주의는 배제하겠다. 대신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가운데 피어나는 휴머니즘을 그리고 싶다. 북한 피난민 소녀가 美해병과 사랑의 감정을 싹 틔우는 장면은 전쟁에 대한 성찰을 제공할 것이다”고 밝혔다.
장진호 전투는 6.25 전쟁이 한창인 1950년 겨울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미국 1 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인근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공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돼 전멸 위기를 극적으로 극복하고, 성공한 후퇴 작전이다.
당시 미 제1 해병사단장이었던 스미스 소장은 “후퇴라니? 젠장, 우린 지금 후퇴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는 중이야!” 라고 외치며 부하들을 훌륭히 지휘했다. 하지만 패배가 아닌 승리였다. 바로 흥남철수 작전을 성공시켰다. 당시 미 해병1사단은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공군 남하를 지연시켰고,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한미연합군은 이 작전의 성공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다.
또한 이 과정에서 기적을 만들어냈다. 바로 민간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전설이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부두의 피란민을 태웠는데 그 인원이 무려 1만 4,000여 명에 달했다. 부산으로 항해하는 중에 5명이 탄생했다.
중공군이 입은 피해는 엄청났다. 이 전투로 인해 중공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중공군 9병단 12만 명의 병력 가운데 4만 5,000여 명 이상이 전사하고, 1만 2,000여 명이 부상자가 발생하는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결국 중공군 제9병단은 회복불능상태에 빠져 1951년 3월이 지나서야 다시 전선에 나타날 수 있었다.
요즘 흥남철수 작전, 베트남 전쟁 등 대한민국 현대사를 소재로 한 영화 <국제시장>이 흥행몰이에 나섰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이구동성으로 “도입부 초반부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는 소감을 전하고 있다. 바로 자신의 부모들의 처절한 생존본능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실이 있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한미연합군의 희생이다. 이들의 희생이 수십만 명의 소중한 생명을 살렸다. 영화 <국제시장>는 우리에게 이 메시지도 전하고 있다.윤명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