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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영원한 2인자 저우언라이가 떠오르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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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5-01-08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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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는 중국을 대표하는 영원한 2인자다. 그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무려 27년 간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현대 중국의 기틀을 마련한 명재상이다.

저우는 1898년 장쑤성(江蘇省) 화이안(淮安)에서 출생했다. 그는 지주·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3년 톈진(天津)의 난카이(南開)중학에 입학해 졸업한 뒤에도 계속 공부하기 위하여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등에서 청강한 적도 있었다.

저우는 톈진의 난카이대학 재학 중 5·4운동에 참가해 투옥, 퇴학당했다. 그의 학구열은 대단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20년 프랑스 유학길에 나서 파리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1922년 중국공산당 파리지부를 창설했고, 1924년 황푸(黃織) 군관학교 정치부 대리로 활약했다, 1927년 북벌군에 호응하는 상하이(上海) 봉기를 주도했다. 그 후 장제스(蔣介石)의 반공 쿠데타를 피하여 우한(武漢)으로 가서 노동자의 무장규찰대(武裝糾察隊)를 조직, 난창(南昌)폭동을 지도하고, 광저우(廣州) 코뮌을 조직했다.

저우의 진면목이 세상에 알려진 사건은 시안사건이다. 1936년 만주의 젊은 군벌 장쉐량이 항일연합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국민당의 장제스를 구금했다. 주은래는 구금된 장제스를 만나 효율적인 항일연합전선을 위해 제2차 국공합작합의를 이끌어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중국은 국공내전에 돌입한다. 저우는 총리 겸 외교부장을 맡아 국제 외교무대에 데뷔한다. 그는 1955년 제네바 회의와 반둥 회의를 주도해 중국을 비동맹세계의 지도국으로 우뚝 서게 만든다. 주은래와 네루가 합의한 ‘평화5원칙’이 그 결실이다.

저우언라이는 전 세계 2인자들의 롤모델이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대참변의 와중에도 그는 한쪽에 치중하지 않는 신중한 처신으로 2인자의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그와 반대의 길을 걸었던. 류사오치, 린바오, 펑더화이는 죽거나 불명예스런 최후를 맞이했다.

저우언 라이의 마지막 작품은 미.중 국교정상화였다. 그는 미국 외교의 대명사인 헨리 키신저와 함께 닉슨 미 대통령과 마오쩌둥 간의 역사적인 미.중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이로써 국제사회는 데탕트 시대를 열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방광암이 걸린 것을 알게 되자 덩샤오핑에게 많은 직무를 인계했다. 얼마 안 지나 1976년 1월 8일 영원한 2인자 저우언 라이는 세상을 떠났다. 중국 현대사의 큰 별이 떨어진 것이다. 중국 인민은 큰 슬픔에 잠겼고, 그를 영원히 추모하게 된다.

저우가 27년 간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중국은 현대국가로서의 기틀을 만들 수 있었다. 특히 문화대혁명의 대혼란시기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는 지도력으로 홍위병들의 파괴로부터 중국의 문화유적들을 보호하고, 미래의 중국지도자가 될 숙청인사를 보호했다. 저우의 배려가 없었다면 덩샤오핑도 홍위병의 희생양이 됐을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국가운영의 혜안을 교훈으로 남기고 39년 전 오늘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은 저우언라이 같은 2인자가 필요한 시기이지만 매우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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