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 한 사회복지사 노력으로 40년 만에 부녀상봉 이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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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3-02-04 08:14본문
40년 만에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양부와 딸을 상봉시켜준 한 사회복지사의 감동스토리가 청주시청 직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그 주인공은 청주시 율량사천동에서 사회복지사로 근무하고 있는 민수진 주무관.
청주시 사회복지공무원 10년차인 민수진 주무관이 이 할머니를 처음 만난 건 지난해 11월 초 이 할머니가 영세민 신청을 하기위해 동주민센터를 방문했을 때였다.
민 주무관의 눈에 처음 뛴 건 여느 남자보다도 세 배 정도는 굵은 손마디. 시골에서 한평생 고생만 하신 팔순의 외할머니 손. 딱 그 손이었다.
할머니는 부산 태생으로 아홉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형제자매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남겨졌다고 한다. 배운 것이 없는지라 부모 이름도 모르고, 집주소도 모른 채 자기 이름석자만 가지고 옆집 아주머니 소개로 양딸로 보내졌다가 바로 파양당하고 오갈 곳이 없어 무작정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단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는 시장 통에서 이집 저집 심부름을 하며 밥을 얻어먹고 그렇게 10대를 보냈다. 그러던 중 17세 되던 해에 자기 주민등록번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알고 보니 출생신고조차 안 되어 있었던 거였다.
주민등록을 하려면 호적이 필요했고 딱한 사정은 시장 통에 퍼져 평소 이 할머니를 보살펴 주시던 동네 반장님이 선뜻 본인의 호적에 자녀로 등재시켜줘 주민등록을 만들게 됐다. 이후 그날부터 이 할머니는 반장님 성을 따라 성씨도 바꿔 사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시장에서 알게 된 지인을 따라 충북으로 내려와 남 농사를 져주고 그 집에서 밥을 먹어먹으면서 결혼도 하지 않고 20년을 넘게 보냈고 양아버지인 그 반장님과는 소식이 완전히 끊기게 됐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나이가 들자 집주인은 할머니를 내쫓았고 결국 청주에 와서 식당 설거지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왔다고 한다.
민수진 주무관은 할머니의 힘든 인생이 너무도 불쌍해서 눈물도 났지만 순간 반신반의하기도 했단다.
피도 한방울 안 섞인 동네사람이 양부가 되었다는 사실도,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런 고마운 분을 여태 한 번도 안 찾아봤다는 것이 의아해서 할머니께 여쭤보았단다.
그러자 할머니는 부끄러워하시면서 “내가 여태 까막눈”이라서 그랬단다. 사실 할머니는 어릴 때는 그 고마움을 모르고 지내다가 나이가 들어 뵙고 싶어 한번 찾아갔었는데 너무 많이 바뀐터라 길을 잃은 후론 엄두고 못내고 지내셨다고 한다.
기초수급자 신청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호적상 부양의무자에 대한 소득재산조사를 거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양의무자로부터 받아야 할 서류들이 있는데 할머니가 서류를 준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민수진 주무관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양부 이름을 조회하여 그 주소지로 부양의무조사에 관련된 공문을 우편으로 보냈다.
혹여나 기다렸지만 2주가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자 민 주무관은 “헤어진지 40년 이상 지났고 지금까지 딸을 찾지 않은 것을 보면 호적만 올려준 남남이지, 자식인가. 어쩜 이 할머니는 잊혀진 이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뒤 지난 11월 25일이 제18대 대통령선거 부재자접수 마감 날이라 일요일 날 사무실에 나와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 청주터미널인데요. 90은 되가는 백발노인이 봉투하나 들고 딸을 찾는다고 하고, 딸 집도 모른다고 하고, 대합실에서 봉투만 쳐다보고 있는데 우편물 발송처가 율량사천동주민센터라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드린다”는 시외버스 기사 아저씨의 전화였다. 고맙게도 할머니의 양부이신 동네 반장님을 대신해 기사 아저씨가 대신 전화를 해 주신거다.
민 주무관은 생각지도 못한 전화를 받고 할머니가 일하시는 식당에 전화를 해보았지만 할머니가 안계셔서 강서지구대에 도움을 요청해 경찰관의 도움으로 수소문 끝에 할머니를 찾아 두 분을 상봉시켜 줬다.
이러한 사실은 1일 청주시청 직원정례조회 시 사례발표를 통해 전직원들에게 알려졌다.
민수진 주무관은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을 이렇게 가족처럼 거둬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있다는 것에 행복했고, 내 평생에 이런 일을 경험할 수 있는 자신의 직업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며 “두 분이 상봉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고 가슴이 뭉클하다. 행복해서 참 만이 울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판용기자
청주시 사회복지공무원 10년차인 민수진 주무관이 이 할머니를 처음 만난 건 지난해 11월 초 이 할머니가 영세민 신청을 하기위해 동주민센터를 방문했을 때였다.
민 주무관의 눈에 처음 뛴 건 여느 남자보다도 세 배 정도는 굵은 손마디. 시골에서 한평생 고생만 하신 팔순의 외할머니 손. 딱 그 손이었다.
할머니는 부산 태생으로 아홉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형제자매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남겨졌다고 한다. 배운 것이 없는지라 부모 이름도 모르고, 집주소도 모른 채 자기 이름석자만 가지고 옆집 아주머니 소개로 양딸로 보내졌다가 바로 파양당하고 오갈 곳이 없어 무작정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단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는 시장 통에서 이집 저집 심부름을 하며 밥을 얻어먹고 그렇게 10대를 보냈다. 그러던 중 17세 되던 해에 자기 주민등록번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알고 보니 출생신고조차 안 되어 있었던 거였다.
주민등록을 하려면 호적이 필요했고 딱한 사정은 시장 통에 퍼져 평소 이 할머니를 보살펴 주시던 동네 반장님이 선뜻 본인의 호적에 자녀로 등재시켜줘 주민등록을 만들게 됐다. 이후 그날부터 이 할머니는 반장님 성을 따라 성씨도 바꿔 사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시장에서 알게 된 지인을 따라 충북으로 내려와 남 농사를 져주고 그 집에서 밥을 먹어먹으면서 결혼도 하지 않고 20년을 넘게 보냈고 양아버지인 그 반장님과는 소식이 완전히 끊기게 됐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나이가 들자 집주인은 할머니를 내쫓았고 결국 청주에 와서 식당 설거지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왔다고 한다.
민수진 주무관은 할머니의 힘든 인생이 너무도 불쌍해서 눈물도 났지만 순간 반신반의하기도 했단다.
피도 한방울 안 섞인 동네사람이 양부가 되었다는 사실도,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런 고마운 분을 여태 한 번도 안 찾아봤다는 것이 의아해서 할머니께 여쭤보았단다.
그러자 할머니는 부끄러워하시면서 “내가 여태 까막눈”이라서 그랬단다. 사실 할머니는 어릴 때는 그 고마움을 모르고 지내다가 나이가 들어 뵙고 싶어 한번 찾아갔었는데 너무 많이 바뀐터라 길을 잃은 후론 엄두고 못내고 지내셨다고 한다.
기초수급자 신청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호적상 부양의무자에 대한 소득재산조사를 거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양의무자로부터 받아야 할 서류들이 있는데 할머니가 서류를 준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민수진 주무관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양부 이름을 조회하여 그 주소지로 부양의무조사에 관련된 공문을 우편으로 보냈다.
혹여나 기다렸지만 2주가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자 민 주무관은 “헤어진지 40년 이상 지났고 지금까지 딸을 찾지 않은 것을 보면 호적만 올려준 남남이지, 자식인가. 어쩜 이 할머니는 잊혀진 이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뒤 지난 11월 25일이 제18대 대통령선거 부재자접수 마감 날이라 일요일 날 사무실에 나와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 청주터미널인데요. 90은 되가는 백발노인이 봉투하나 들고 딸을 찾는다고 하고, 딸 집도 모른다고 하고, 대합실에서 봉투만 쳐다보고 있는데 우편물 발송처가 율량사천동주민센터라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드린다”는 시외버스 기사 아저씨의 전화였다. 고맙게도 할머니의 양부이신 동네 반장님을 대신해 기사 아저씨가 대신 전화를 해 주신거다.
민 주무관은 생각지도 못한 전화를 받고 할머니가 일하시는 식당에 전화를 해보았지만 할머니가 안계셔서 강서지구대에 도움을 요청해 경찰관의 도움으로 수소문 끝에 할머니를 찾아 두 분을 상봉시켜 줬다.
이러한 사실은 1일 청주시청 직원정례조회 시 사례발표를 통해 전직원들에게 알려졌다.
민수진 주무관은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을 이렇게 가족처럼 거둬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있다는 것에 행복했고, 내 평생에 이런 일을 경험할 수 있는 자신의 직업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며 “두 분이 상봉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고 가슴이 뭉클하다. 행복해서 참 만이 울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판용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