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속 자연공간…‘걷고 싶은 길’ 열렸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작성일 10-11-12 07:19본문
북한산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뚜렷이 달라진 것은 등산객들의 산행 방식이다. 그동안 북한산을 찾는 등산객들은 대개 정상을 밟기 위해 수직으로만 오르내렸다.
하지만 이젠 굽이굽이 산허리를 돌아 수평으로 걷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 두어 달 전 개통된 북한산 둘레길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다.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의 걸음은 느긋하고 낯빛은 부드럽다. 산행이 편안해지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북한산 둘레길은 정상 등정을 위한 등산로가 아니다. 산 중턱과 산자락을 굽이굽이 에돌아가는 수평의 산책로다. 자기 동네의 앞산이나 뒷산을 산책하는 것처럼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길도 흙길, 돌길, 바윗길, 큰크리트길, 아스팔트길, 낙엽길, 나무데크길 등이 번갈아 나타난다. 때로는 작은 개울도 건너고, 가끔씩은 비탈진 산길을 오르내리기도 한다. 도심의 빼곡한 빌딩 숲이 조망되는 천연전망대도 들르게 되고, 북한산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능선길을 지나기도 한다.
하지만 시종일관 산중의 숲길만 걷는 것은 아니다. 북한산 둘레길 전체 구간 중 약 40퍼센트는 북한산국립공원의 바깥 지역을 통과한다. 때로는 주택가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어느 구간에서는 지루한 찻길을 따라가기도 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야 하는 비탈길도 있고,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 절로 나오는 평지길도 있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길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길의 형태와 느낌이 소나기를 뿌린 뒤의 구름처럼 끊임없이 변화한다.
북한산과 도봉산을 합친 북한산국립공원의 둘레길은 총 70킬로미터다. 하지만 현재는 북한산 구간에 속하는 44킬로미터만 개통됐다. 도봉산 구간 26킬로미터는 내년에 개통될 예정이다.
지난 8월 31일 정식 개통된 북한산 구간 둘레길만 해도 이수(里數)로는 무려 1백10여 리에 달한다. 짧지 않은 그 길을 한번에 다 걷기는 쉽지 않다. 전문 산악인들은 하루 만에도 가능하겠지만, 일반인들이 한꺼번에 전 구간을 걸으려면 적어도 이틀 이상의 일정이 필요하다. 그래야 무리하지 않고 기분 좋게 걸을 수 있다.
북한산 둘레길 40%는 북한산국립공원 바깥 지역 통과
북한산 둘레길은 즐겁고 편하게 걷는 길이다. 굳이 제1구간인 소나무숲길부터 시작해 마지막 구간인 우이령길에서 끝낼 필요도 이유도 없다. 찾아가기 쉽거나 먼저 마음이 끌리는 구간부터 시작하면 된다. 길은 혼자 걸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만큼 뚜렷하고 표시물도 많다. 곳곳마다 이정표, 안내판, 상세지도가 설치돼 있고, 모두 9개소의 전망대와 35개소의 쉼터도 마련돼 있다.
북한산 둘레길은 총 13개 구간으로 나눠져 있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소나무숲길을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걸으면 순례길, 흰구름길, 솔샘길, 명상길, 평창마을길, 옛성길, 구름정원길, 마실길, 내시묘역길, 효자길, 충의길 등을 두루 거치게 된다.
충의길의 종점인 경기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와 소나무숲길의 시점인 강북구 우이동 사이에는 우이령길 구간이 있다. 북한산 둘레길 구간 가운데 길이가 가장 긴 우이령길은 미리 예약해야만 걸을 수 있다. 우이령길이 6.8킬로미터나 되는 반면, 가장 짧은 마실길은 1.5킬로미터에 불과해 30~40분이면 걸을 수 있다. 대부분의 구간은 2~4킬로미터쯤 된다. 쉬엄쉬엄 걸어도 한두 시간이면 완주할 만한 거리다.
▲가을 햇살이 긴 그림자를 드리운 구름정원길의 나무데크 구간.▲▲평창동과 정릉동 사이의 명상길 구간은 시점과 종점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제법 가파르다. |
북한산 둘레길은 한 번에 두세 구간씩만 걷는 것이 적당하다. 그마저도 부담스럽다면 한 구간씩 차근차근 걸어보는 것도 좋다. 모든 구간이 저마다 독특한 매력과 풍경을 지녀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게 마련이다. 그래도 특히 인상적인 몇 곳을 꼽는다면 소나무숲길, 순례길, 명상길, 평창마을길, 옛성길, 구름정원길 등이 꼭 한번 걸어볼 만하다.
소나무숲길에는 이름 그대로 소나무가 많다. 길을 걷는 동안 그윽한 솔향기가 끊이질 않는다. 도중에 왕릉처럼 규모가 큰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의 묘소와 시원한 물맛이 일품인 만고강산약수터도 지난다. 초입에서는 북한산에서 가장 큰 계곡을 따라 서늘한 물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다. 이 구간은 강북구 우이동의 우이령길 입구에서 솔밭근린공원까지 2.9킬로미터가량 이어진다.
애국지사·이준 열사 묘소가 있는 ‘순례길’
소나무숲길이 끝나면 곧장 순례길로 접어든다. 이 길 주변에는 국립 4·19묘지와 김창숙, 양일동, 서상일 등의 애국지사, 그리고 헤이그 밀사사건의 주역인 이준 열사의 묘소가 있어서 마음이 절로 숙연해진다. 또한 작은 계곡에는 솔가지를 엮어 만든 섶다리가 놓여 있어서 시골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순례길의 종점에서 시작되는 흰구름길은 전망이 탁월한 구름전망대를 거쳐간다. 높이 12미터의 이 전망대 꼭대기에 올라서면 북한산과 도봉산의 암봉들뿐 아니라 강북구와 도봉구의 시가지, 그리고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등의 산자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또한 이 구간에서는 물이 맑고 수량도 제법 풍부해서 조선시대 궁궐의 나인과 무수리들이 놀러와 빨래했다는 빨래골도 지나게 된다.
▲순례길 구간의 작은 계곡에 놓인 섶다리.▲▲흰구름길 빨래골 부근의 나무계단을 오르는 탐방객. |
성북구 정릉동 청수장과 종로구 평창동의 형제봉 입구를 잇는 명상길은 시점과 종점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제법 가파르다. 북한산 둘레길 가운데 기중 어려운 코스다.
하지만 숲길의 운치가 아주 그윽한 데다 이따금 만나는 작은 계곡과 폭포의 맑은 계류가 산행의 수고로움을 말끔히 씻어준다. 길의 중간쯤에서는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3개의 산책로가 개방된 북악하늘길(3.94킬로미터)과 연결된다.
명상길을 지나면 곧바로 평창마을길에 들어선다. 서울의 부촌(富村) 중 하나이자 문화마을인 평창동의 골목길을 따라가기도 하고, 바위 능선길과 솔숲을 지나기도 한다. 5킬로미터나 되는 구간이지만, 길의 풍정이 다채롭고 마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해서 지루하지는 않다.
평창마을이 끝나면 옛성길이 시작된다. 평창동의 탕춘대성 암문(暗門) 입구에서 은평구 불광동의 불광사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탕춘대성은 한양의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총길이 4킬로미터쯤 되는 옛 성이다.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해 북쪽을 향해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가 모래내를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됐다고 한다. 평창동의 탕춘대성 입구에서 가파른 숲길을 올라서면 어른 키보다도 약간 더 높은 암문을 통과한다. 제법 형태가 온전한 옛 성문이다. 암문을 지나면 한동안 조붓한 솔숲길과 전망 좋은 능선길을 번갈아 지난다.
능선길에서는 수리봉(족두리봉), 향로봉, 비봉, 문수봉, 보현봉 등 북한산 서남부지역의 암봉들이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온다. 산속에 들어 있으면서도 산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구름 위를 산책하는 기분 만끽하는 ‘구름정원길’
구름정원길은 북한산 둘레길에서 가장 전망 좋은 구간이다. 구름정원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구름 위를 거니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나무데크 탐방로가 설치돼 있다.
수리봉 아래의 기암괴석과 다양한 형태의 소나무들이 한데 어우러진 풍광은 한 폭의 전통 산수화처럼 아름답다. 게다가 하늘과 맞닿은 듯한 이 길에서는 은평구 불광동 일대 주택가와 아파트단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인접한 시가지가 딴 세상으로 여겨질 만큼 길의 운치가 깊고 그윽해서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구간이다.
북한산 둘레길을 한번 걷고 나면 문득 ‘서울 사람인 게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든지 기대거나 안길 수 있는 어머니를 바로 옆에 모시고 사는 것처럼 든든하고 편안하다. 그래서 북한산 둘레길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그 걸음을 좀체 멈추기 어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