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업 40년 외길인생 ‘세탁장인’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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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8-03-24 16:49본문
사진 : 부여수원세탁소 세탁소경력 40년 세탁장인 서상열 사장
올해 서상열씨(55년생)는 세탁소를 운영한지 만 41년이 되었다. 서사장은 충남 부여에서 “수원세탁소”라는 상호로 세탁업을 하고 있다.
그의 삶을 설명하자면, 1970년대 그의 나이21살 힘들게 경상도에서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 후 처음 양장점에서 양복을 제단하고 맞추는 업을 배웠다.
형편이 좋지 않았던 시절 그때는 모두가 기성복보다는 양장점을 찾아 옷을 맞추어 입곤했다.
양장점에서 옷을 제단 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새벽에 출근해서 새벽까지 일했고, 옷을 제단하면서 그를 가르치던 스승은 많이도 매를 댔다.
사진 : 군복무시절 서상열 사장
옷을 망치고 실수를 반복하면서 그는 엉덩이에도 ‘굳은 살이 생기는게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양장업이 손에 익을 쯤 그 당시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동시에 기성복이 늘고, 양장점에서 비싸게 맞춰 입는 것 보다는 사람들이 기성복의 좋은 원단과 품질 좋은 옷들을 자유롭게 입어보면서 현장에서 기장과 치수를 맞추어 주니, 양장업이 크게 위축되었던 시기였다.
서사장은 '그 당시 양복을 하나 만들 때 걸리는 시간이 혼자서 다했기 때문에 빠르면 이틀 걸렸다.’고 하니, 양복 값이 기성복과 차이가 날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금이야 원단이 좋은 기성복이 너무 많이 나오고, 옷값이 저렴하니 오히려 가격이 비싸도 자신만의 옷을 만들어 입는 맞춤정장의 인기가 젊은 세대에서도 크다.
자신의 개성에 맞추어 단추와 깃 등 차별화된 스타일과 자신의 신체의 단점까지 커버할 수 있는 맞춤정장이 비싸고, 인기도 좋다. 맞춤복이 나름의 희소성에 가치를 두고 있으니 그 가격이 비싸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사진 :양장장업을 배우던 시절 서상열 사장
서상열씨는 그 당시 양장업을 하고서는 결혼도 못하고 아이가 생겨도 생활이 어려울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아는 형님이 운영하는 세탁소로 가서 하루 일과를 보고, 사람들이 왕래하는 것과 하루 수입을 분석했다. 사람들이 옷을 얼마나 사 입고, 또 기성복이 얼마나 많이 시대를 변하게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얼음장사 하시던 어머니께서 주신 쌀 두포대 라면 한 박스의 기적.”
그 길로 그 세탁소 권리금을 조금 주고 시작하게 되었고, 결혼할 새색시를 대리고 함께 세탁소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서사장의 손에 주어진 건 힘들게 얼음 장사를 했던 어머니가 주신 “쌀 두 포대”와 “라면 한 박스”가 전부였다고 한다.
사진: 결혼식이후 신혼여행 중 아산만에서 찍은 사진
정말 힘들게 살았던 탓일까. 그의 생활력은 대단해 보였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무거운 다리미질을 수 시간동안 반복했다. 기자가 다녀간 때는 “ 5월 ” 아직은 선선한 날인데도 날이 더운 요즘이라서 다림질을 하는 서사장의 얼굴에 금새 땀이 매쳤다.
찾아간 기자도 다리미질을 한수 가르쳐준다하여 다리미질을 해보았는데 그냥 들어도 묵직한게 잠깐했다고 어깨가 뻐근했다. 수분도 안되어서 땀이 나고 몸에 맥이 빠졌다. 운동 좀 한다는 건장한 청년에게도 이리 힘든 일이 이분에게는 쉬워보였다.
그러나 서사장에게 이일에 대해 물으니 자긍심이 대단했다.
“ 이일로 아들 둘을 키웠고, 모두 대학 보내고 지금은 다들 결혼준비하고 있지요. 저는 결혼하고 무일푼으로 시작한 이 일이 40년이 지난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사실은 환갑 되기 전에까진 못할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하니 다행이죠.”
사진: 서상열사장의 첫째 아들
“운동할 수 있는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어서 체력단련으로 생각하고 했던 일 .”
“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없고, 또 운동할 여유도 없어서 항상 체력단련이라고 생각하고 다리미질을 했습니다. 항상 옆에서 아내가 도왔고, 지금은 아내가 저보다 더 잘하고 또 저보다 더 고생을 하지요..”
서사장은 그 옛날 점심에 쌀을 아끼려고 라면을 먹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점심이면 항상 라면을 먹고 있다고 한다.
아내는 “질리지도 않느냐”고 물어도 그는 항시 라면을 고집한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그때 그 힘들면서도 정신없이 아이들을 키웠던 아련한 생각이 든다고 한다.
아내 방정희 여사는 정말 대단한 분이셨다. 집안일이며, 세탁소 일을 도맡아 하며, 아이 둘을 키운다는 건 대단한 일이였다.
방정희여사의 손을 보니 관절이 심하게 와서 퉁퉁부어있었다.
50대의 연세에 순하고 맑은 인상에 덕 많아 보이는 방정희 여사는 말한다. “ 첫째를 임신해서 결혼을 했는데, 처음에는 세탁 일을 저에게는 안 시킨다고 하더니 결혼하자마자 바로 제가 돕는다고 한 것이 지금까지 같이하게 되었어요. "
"곁에서 보조하고 이제는 다림질을 제가 더 많이 하지요 첫째가 아장아장 걸을 때 제 나이 21살이었고, 20살에 결혼해서 바로 아줌마가 되었는데, 제 삶에 젊었을 때가 있었는가 싶어요. 그때는 너무 어렵게 살고 힘들다보니,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살아서 아쉽고 그렇지요 아들들이 각자 혼자서 큰 거같아요 .”
“한번은 큰아이가 막 걸음마를 끝내고 남편하고 둘은 일을 하고 있는데, 아이가 걸음마를 막뗘서 신나게 걷고 있었어요. 돌봐줄 사람은 없고, 하니, 손님들이 오가며 한번씩 안아주고, 놀아주고, 간식도 사다가 주곤 했지요. 한 평도 안되는 시멘트다용도실에서 낮에는 일과 빨래에 싸우고 동시에 밥 하고, 오후에는 아이들 씻기고 청소하고 진짜 총만안들었지 전쟁터였어요. 거기다가 술 좋와하는 남편만나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지요..”
“그런데 지금 그 힘든 날이 지나고 나니, 벌써 청춘이라는 건 볼 수도 없이 자연스럽게 없어졌습니다. "
"언제 내가 젊었었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시간이 빠르고, 그래요..”
사진 : 방정희 여사와 둘째 아들
가게와 집이 붙어있는 구조의 집은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한평도 안되보이는 곳의 다용도실은 아내의 공간이었다. 세월의 흔적은 바닥과 벽에서 볼 수 있었는데, 바닥은 이미 시멘트가 벗겨져 평평한 곳이 없었고, 천장은 이미 다 부서져 내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벽도 가관이었다. 시멘트가 오래되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틈틈이 보이는 색이 다른 시멘트의 땜질은 부부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알수있는 대목이었다. 어렵지만 희망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볼 수 있는 현장의 모습, 이곳에서 아내는 설거지며, 아이들을 씻기고, 빨래도 하며 40여년의 세월을 보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요즘은 새로 나오는 프랜차이즈 세탁소가 많이 있다. 그런데 세탁소의 경영형편은 어떤지 물어보았다.
“프랜차이즈 세탁소는 계속 나오고 있지요 여기 같은 시골(부여군)도 많이들 들어와요 ."
"가격도 싸고 수거도 돌아다니면서 하고, 편리한 시스템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더 잘 알아요 우리 세탁소는 전부 손빨래 합니다."
" 세세한 얼룩도 빼지 않으면 제가 더 답답하고 또 제 아내가 더 머라고 해요 신경 좀 쓰면서 해주자고 왠만하면 우리집 찾아와주는데 더 잘해줘야지 되지 않겠냐고 야단이죠. 보이는 세탁소가 전부 그렇지는 않거든요.”
“ 현재 세탁소는, 빠르게 생기는 프랜차이즈 세탁업소나 빨래방에 밀려 문 닫는 곳이 많습니다."
" 제가 세탁소를 하면서 충남세탁협회회장을 맡은 적도 있는데, 많이 문 닫았어요 그렇지만, 이 분야도 분명히 전문인들이 있고, 세탁일 이라는게 빨래 돌리고 공기로 대충다림질해서 싸게 받고 배달하면 편하고 싸지만, 소비자는 사실손해가 더 크지요 이유는 다림질자체가 달라요 ."
"우리다림질은 스팀을 사용해서 주름을 잡습니다. 그리고 스팀과 열로 하는 다리미 두 개를 이용해서 두 가지 다리미질을 교차해서 누르면 한참을 입다가 세탁을 해도 심지어 다림질선이 없어지지 않아요.”
“옷에 얼룩이 생긴 것 들도 하나하나 빼는 법이 다 달라요 저희만의 노하우죠.(웃음) 또 세탁법도 다르기 때문에 손으로 분별하고 얼룩도 손으로 직접 다양한 세제를 이용해서 빼야 합니다. "
"쉬운 게 아니지요, 세탁소를 경영하면서 양심 없이 장사해 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 집은 지금도 부여에서 가장 일이 많은 집이 되었고, 가장 오래된 세탁업소가 되었습니다. "
"프랜차이즈세탁소가 들어왔어도 많이 달라지지 않았어요. 이유는 앞에서 얘기한데로 세탁업도 옷을 맡긴 사람을 생각하며 하나하나 손으로 주름잡고 다시 문지르고 땀을 흘려가며 기분 좋게 옷 입을 분을 생각하며 정성을 들려서 다려야 합니다. "
"지금 많이 보이는 공장식 업소는 기계로 옷을 입혀서 눌러 다림질하는 기계식 다리미질은 당연이 다림질이 약하고 주름도 금방 갈 수 밖에 없지요.”
사진: 충남부여군에 위치한 수원세탁소 40년 세탁장인 서상열 사장
“짜장면 한 그릇먹는 것도 아까워 점심에는 항상 라면, 61세 환갑에 처음 여행은 제주도.”
서 사장은 얼마전 61세의 나이로 환갑을 맞았다. 그의 환갑잔치는 화려하게 보낼 것 같았지만, 아들들이 아직 결혼을 안 해서 가볍게 가족들과 식사만을 했다고 한다. 어려운 살림살이였지만, 그는 아들 둘 자랑도 늘어놓았다.
“80년대 어쩌면 흔히 볼 수 있는 짜장면 하나도 쉽게 먹이지 못했어요. 그러나 아들들은 항상 잘 해 왔고 점심에 주는 라면도 맛있게 먹어주었지요. "
"아들들도 장성하여 각 분야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었고, 대학까지 가르쳤지만, 스스로 장학금을 받으며, 졸업하고 막내아들은 이후에 석사·박사학위 받고, 그 등록금전부도 자기가 알아서 했지요.”
“ 여행도 한번 제대로 안 가보고 지독하게 살았어요. 그래서 제가 61세 되는 때 동갑네 계하는 게 있어서 그걸로 제주도를 처음 다녀왔어요. "
"물론 아들들이나 지인들이 이제는 여행도 다니고 하라고 하지만, 저는 이게 좋습니다. 고단하게 하루일이 끝나면 가는 '연탄집' 이라는 식당이 있는데 가면 만원이면 소주 한 병에 안주를 줘요. 그럼 동갑네 친구들과 그거 먹고 집에 와서 자는데 그게 소소한 행복입니다.(웃음) ”
그는 지금도 욕심 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의 주변인들은 그가 “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한다. 일이 끝나면 함께 나이 먹고 고생했던 주변의 친구들과 만나 소주 한잔을 기울인다.
동네 허름한 대포집은 그에게는 어느 화려한 식당이나 레스토랑보다 좋은 음식점이었고, 정겹고 즐거운 힘든 하루의 끝을 털어내는 시간이었다.
서사장의 가벼운 인터뷰로도 그의 세탁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서사장의 삶의 진정한 우리 서민들의 삶으로 대변되는 삶이며, 그 삶에서는 자신의 일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양심이 있었으니, 그를 우리언론사에서는 “세탁장인”의 타이틀로 상패를 주었다.
앞으로도 열심히 사는 여러 분야의 서민들의 삶이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
기사승인: 서병진
글 : 서병진
취재 :김지은
skysun0408@hanmail.net